다빈치가 구현한 ‘모나리자‘ 그림이 유명한 것은 그림 속에
잔잔하게 담겨있는 신비한 미소 때문인지 아닐까. 이 미소가
없다면 그림의 가치 또한 그만큼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 모나리자에 마스크를 씌워보자. 마스크로 신비한
미소가 가려진 모나리자는 더 이상 매력이지 않다.
마스크는 상대 얼굴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든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한때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은 마스크를
착용해야 만 했다.
마스크 속에 가려진 사람들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동네 공원 걷는 길에 만나는 산책객들을 보면 한결같이
깊게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 가자미눈을 뜨고
흘깃흘깃 쳐다보며 지나칠 뿐이다. 보통때는 이런 산책객들
끼리 눈인사로 미소를 지으며 “Hello”하면서 지나쳤는데.
미소와 웃음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많은 기쁨을준다.
팬데믹 동안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 보면 미소와 웃음과는
거리가 먼 무표정한 생활을 당연시 하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마스크 착용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입이 가려져 있어서
미소를 보지 못한다. 생각건대 사람들은 눈을 보고 내가
웃는지 알 수 있을거다. 그 생각에는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 입가의 근육과 눈을 주름지게 만드는 근육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즐거워서 웃는 진짜 웃음은
눈과 입 주변이 모두 움직여 만들어낸 웃음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뒤센 스마일‘(Duchenne smile)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프랑스의 신경심리학자인 기욤 뒤센
(Guillanme Duchenne 1806-1875)이 이런 미소를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와 대비되어 가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미소를 ‘팬암 스마일‘ (PanAm smile)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팬 아메리카 항공사의 승무원들이 상업적으로 거짓 미소를 짖는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미소가운데는 자연스럽게 웃는 미소가 있는가하면,
억지로 웃는 미소도 있다. 환한 긍정의 미소인 뒤센 스마일이든
인위적인 미소인 팬임 스마일이든 그저 빙긋 웃기만이라도 하자. 미소는 어느 정도의 위력도 지니고 있다. 어느 과학 저널리스트의 저서 ‘얼굴‘이란 책에서 판사들은 재판 중에 미소를 짖는 피고인에게 더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고도 한다.
가식 없는 미소는 가장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법정에서도 최고 변호사로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다.
미소는 전염성도 강하다.
한 사람이 미소를 지으면 옆에 있던 다른 사람도 저절로 미소를 짖게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나마 웃음이 줄어든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내 자신의 삶과 내 가정, 이웃의 어두운 분위기를 환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늘 미소를 지으며 웃어보자.
행복해서 웃는 것이아니라
웃으면 행복해 진다.